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고구려-수 전쟁 (문단 편집) === 전쟁의 시작 - [[랴오허|요하]] 도하 전투 === 이처럼 엄청난 병력을 동원한 건 대제국의 위엄을 보이기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고구려의 방어선을 돌파하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고구려의 성은 촘촘히 연결돼서 하나의 방어선을 구축했다. 과거 여러 성의 집합이었던 [[만리장성]]이나 훗날 [[고려]]에서 축조한 [[천리장성]] 등 성들의 집합인 일종의 [[마지노선]]과 같은 방어선이었다. 한 군데를 뚫어도 주변의 성에서 응원군이 와서 역포위하거나 후방을 교란해서 보급로를 차단하고, 설사 성을 함락하더라도 주변의 방어선 자체는 건재하기 때문에 항상 주변의 성을 경계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100만 명이라는 대규모 병력을 방어선에 투입하면 야전에서 일단 밀리니 함부로 전투도 못 하고 다른 성들에서 응원군도 오기 힘들며, 설사 오더라도 역포위 위험도 적다. 거기다 그 많은 병력이 어디로 움직일지 모르기 때문에 각 성은 자기 방어하는데 신경을 쓸 수밖에 없고 예비대 투입도 곤란하므로 고구려의 방어선은 일시적으로 마비될 수밖에 없었다. 수 양제는 [[우중문]]과 [[우문술]]로 하여금 육로로 요동을 공격할 것을 지시하였으며, [[내호아]]에게는 수군 대장의 직책을 맡겼다. 그리하여 육군이 요동을 뚫고 고구려의 내지로 진입할 때 내호아의 수군이 이와 합류하여 고구려의 도읍인 평양성을 친다는 계획을 세웠다. 612년 음력 2월, 수 양제가 이끄는 부대는 요수(遼水)에 이르렀다. 그리고 여러 군대가 다 모여 대단한 숫자를 이루었지만, 고구려군은 우선 강을 막고 지켜서 수나라 군대가 강을 건너지 못하게 하였다. 이에 수양제는 수나라의 공부상서(工部尙書) [[우문개]](宇文愷)에게 명령하여 강을 건널 수 있는 [[부교]]를 만들게 하였다. 이 [[공병]] 작업은 차질을 빚는데, 첫 번째 시도 때는 부교를 세 개 만들었으나 [[메이드 인 차이나|강의 길이를 잘못 예측하여 부교가 딱 어른 한 명 키 남짓하게 모자랐고]][* 이 원인에는 [[고구려]]와 [[수나라]] 간 [[척]]의 단위가 달라서 수나라 측에서 입수한 정보가 에러가 났다는 설이 있다. 고구려는 때에 따라 한나라의 척과 고구려의 척을 혼용했는데 한나라 척만 사용하던 수나라가 고구려 척을 한나라 척으로 착각했다는 것이다. 고구려 척은 한나라 척보다 1척당 5cm가량 더 길다. 어쨌거나 수나라 측이 제대로 정보 파악도 하지 않고, 측량 기술도 떨어졌다는 점에서 변명의 여지가 없지만.] 이로 인해 1차 도강에는 실패했다. 게다가 이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도강 중인 수나라군을 고구려 군대가 화살 세례를 퍼부으며 공격하자 큰 피해를 받았다. 수나라군은 맥철장(麥鐵杖) 등의 장수가 용감하게 부교로 뛰어올라와 싸워보려 했으나 전사웅(錢士雄)·맹차(孟叉)와 함께 전사하였다. 이에 수 양제는 잠시 물러났다가 소부감(少府監) 하조(何稠)에게 명령을 내려 다시 부교를 만들게 했고, 하조가 2일 만에 이를 완성하여 다시 한번 공격하자, 이번에는 고구려군이 대패하여 무려 10,000명의 사망자를 냈다. 확실히 야전에서는 수나라 군대의 우위를 인정할 수밖에 없는 형세가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